강의, 시험, 심지어 졸업도 없는데... "이 학교 와서 사람이 바뀌었어요"
문제 해결을 위한 팀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대안교육기관, '거꾸로캠퍼스' 가보니
오후 2시의 ‘거꾸로캠퍼스’, 분명 학교인데, 정해진 수업도, 강의하는 선생님도 보이지 않았다. 대신 한쪽에서는 휠체어 이용 장애인들을 위한 경사로 이야기, 다른 한편에서는 자립준비청년들의 금전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이야기가 펼쳐지고 있었다. 이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은 교과서 속의 딱딱한 지식보다, 세상의 문제를 직접 정의하고 해결하며 터득하는 말랑말랑한 지식을 습득하고 있다.
이러한 풍경이 펼쳐지는 곳, 거꾸로캠퍼스는 서울 성북구에 위치한 대안교육기관이다. 이곳에서 학생들은 우리 사회의 문제를 탐색하고 정의내려 직접 해결까지 한다. 일회성·단발성 팀 프로젝트가 아니다. 특별한 일이 없다면 최소 2년간 한 문제에 한 팀을 이뤄 매달린다. 문제 해결을 위해 앱을 만들기도 하고, 캠페인을 벌이기도 한다. 심지어는 보드게임도 만든다. 문제 해결의 과정도 △문제 탐색 △문제 정의 △문제 실험 △문제 해결의 4단계로 나뉜다. 이러한 단계들을 통해서 자기주도적으로 학습하는 방법을 배우고, 세상에 질문하고 사고하는 힘을 기른다.
물론 교과 교육도 한다. 하지만 다른 학교처럼 일방적으로 교사가 학생에게 지식을 전달하는 방식의 수업이 아닌, 학생들이 직접 모여 UNSDGs(유엔 지속가능개발목표) 중 하나의 주제를 선택해 한 학기 내내 그 주제에 대한 교과 공부를 한다. 그렇기에 시험도 없고, 성적이 나오지 않기 때문에 경쟁도 없다. 성과에 대한 뚜렷한 기준이 없기에 졸업도 없다. 학생 자신이 '이제 새로운 여정을 시작할 때가 됐다'고 느끼면 ‘엑시트’를 한다. 물론 더 배우고 싶다면 3년보다 오래 학교에 남을 수 있다. 학생들은 제각각 나이도 다르고, 팀에서 맡은 역할도 다르다. 구성원들은 서로를 두 글자 별명으로 부른다. 선생님(코칭스태프)도 별명으로 불린다. 이정백 교장 선생님은 ‘쩜백’인 식이다.
이러한 학교에 다니는 건 어떤 느낌일까. 입시 경쟁과 학벌주의가 점점 심해지는 우리 교육의 진정한 대안이 될 수 있을까. 직접 알아보기 위해 지난 16일 거꾸로캠퍼스를 찾았다. 총 11명의 학생과 졸업생 1명, 4개 팀을 인터뷰했다. 우선 각각의 팀들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봤다.
다양한 프로젝트로 소통·자기주도성 ↑
우선 ‘연청’ 팀을 만났다. 연청 팀은 ‘문제 정의’ 단계에 있다. 이 팀은 과거 ‘문제 탐색’ 과정에서 자립준비청년들의 금전적인 문제를 선정했다. 자립준비청년은 아동양육시설·위탁가정 등에서 보호받다가 만 18세가 되어 홀로 사회로 나온 청년들이다. 시설에서 교육을 받기는 하지만, 뒤쳐진 내용을 가르치거나 정보격차 때문에 여러모로 미숙한 부분이 많다. 그래서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치열하게 토론 중이다. ‘연청’ 팀의 리더인 든해(17)는 “자립준비청년들은 통장 개설부터 막히는 경우가 많다”며 “이러한 문제를 구체화하고 있다”고 말했다.

두 번째 팀은 ‘무턱대고’다. 무턱대고 팀은 휠체어 이용 장애인들의 이동권 문제를 해결하고 있다. 건물 등의 턱을 없애기도 하고, 경사로를 설치하기도 하는 것이다. 이 팀은 ‘문제 실험’ 단계에 있다. ‘문제 실험’ 단계는 ‘문제 탐색’과 ‘문제 정의’ 단계에서 구체적으로 정한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지 솔루션을 찾는 단계다. 실제로 여러 휠체어 이용 장애인들을 인터뷰하기도 하고, 장애인 이동권 단체 ‘무의’와도 협력하고 있다. 현재는 경사로를 직접 설치해 보기 위해 함께할 수 있는 단체를 찾고 있다. ‘무턱대고’의 리더 보나(17)는 “장애 인식 개선의 일환으로 인스타그램 계정을 활발히 운영하고 있다”고 했다. 기획자 신아(17)는 “코칭스태프(선생님)들께서 많은 도움과 조언을 주신다”며 “프로젝트 진행에 많은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세 번째로는 ‘슬로우즈’ 팀을 만났다. 슬로우즈 팀은 ‘문제 해결’ 단계로, 패스트 패션의 환경 문제를 탐구하고 있다. 리더 리스(17)는 “특히 MZ세대는 옷을 많이 사서 입지 않는 경우가 많다”며 문제가 심각하다고 강조했다. 이 팀은 안 입는 옷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스마트 옷걸이를 만들고 있다. 스마트 옷걸이는 옷을 옷장에 걸어 두고 한 달 동안 입지 않으면 빨간색으로 경고등을 띄워 주는 옷걸이다.
‘문제 해결’ 단계에 있는 또 다른 팀 ‘맵퍼스’도 만났다. 맵퍼스 팀은 가정 내 상비약 관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앱을 만들었다. 무분별하게 집 안에서 떠도는 의약품을 생애주기별로 관리해 오남용 등 안전사고를 예방한다는 취지다. 디자인을 담당한 오즈(18)는 “스타트업을 운영하는 느낌”이라며 “앱 만드는 게 힘들지만 보람차다”고 소회를 밝혔다.

"프로젝트로 쌓은 인맥, 취업에 도움돼"
이렇게 특이한 교육을 받는 학생들은 얼마나, 어떻게 성장했을까. 이 교육의 장점은 어떤 게 있을까. 실제 학생들의 평가는 호평 일색이다. 우선 별다른 규제가 없다 보니 자유롭다는 점이 있다. 연청 팀의 겨울(19)은 일반 고등학교에서 2학년까지 다니다 거꾸로캠퍼스로 왔다. 그는 “일반계 고등학교와 비교해 확실히 자유롭다”며 “다른 교육을 받는 느낌이다”라고 거꾸로캠퍼스에서의 삶을 묘사했다.
팀 프로젝트에서 오는 장점도 있다. 많은 학생들이 의견 조율과 소통 방법을 많이 배웠다고 했다. 슬로우즈 팀의 리스는 “다른 학교는 시험을 통해 개개인의 성과가 정확히 측정되고 개개인이 책임지는 시스템이지만, 거꾸로캠퍼스는 팀 전체가 책임진다”며 연대의식을 배웠다고 했다. 그렇다면 발전했다는 것을 어떻게 평가하냐는 기자의 질문에는 “대회나 공모전이 시험과도 같은 느낌이다. 입상 실적을 통해 '잘 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다”고 답했다.
과거 일반 초등학교·중학교에서 시키는 것만 하며 수동적으로 살았던 학생들은 거꾸로캠퍼스에 와서 자기주도적으로 노력하는 사람이 되었다고 했다. 연청 팀의 든해는 “거꾸로캠퍼스에 와서 ‘뭐라도 해 봐야지’라고 생각하게 됐다. 이렇게 바뀐 나 자신이 뿌듯하다”고 했고, 슬로우즈 팀의 기가(17)는 “사람이 바뀌었다. 원래 대인관계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는데, 거꾸로캠퍼스에 와서 소통 방법은 물론이고 위기 대처 능력까지 키우게 됐다”고 전했다.
이렇게 많은 장점이 있지만, 가장 돋보이는 건 아무래도 ‘사람’이다. 인터뷰한 학생 절반 이상이 장점으로 ‘인맥’을 꼽기도 했다. 다양한 프로젝트를 하면서 바깥에서 여러 사람을 만나고 협력하다 보니 학생 대다수가 엑시트(졸업)할 때 소중한 인맥을 가지고 떠난다. 코칭스태프(선생님)들도 학생들이 여러 사람을 만날 수 있게 돕는다. 같이 일할 만한 단체를 추천해 주기도 하고, 인터뷰 요청 이메일 쓰는 법까지 알려준다. 다양한 외부 활동도 인맥 형성에 도움이 된다. 각종 대회나 공모전에 나가면 기업가들이나 교수들을 많이 만나게 되는데, 이렇게 맺은 인연이 취업까지 이어지기도 한다.
창업·대학·취업 3가지 중 진로 선택한다
거꾸로캠퍼스에서 학습한 학생들은 주로 어떤 진로를 선택할까. 대학에 진학하는 학생이 대다수인 일반 고등학교와 달리, 취업을 하기도 하고, 거꾸로캠퍼스에서 진행한 프로젝트를 가지고 그대로 회사를 차리기도 한다. 기자의 인터뷰에 응한 한 졸업생은 “프로젝트를 하면서 쌓은 인맥이 취업에 큰 도움이 된다”고 했다. 이러한 인맥과 별개로 다양한 외부 활동을 통해 쌓은 경험이 대학 진학에 도움이 되기도 한다.
"AI는 일상"
앞으로 미래는 ‘AI 시대’가 될 것 같다는 관측이 우세하다. 하지만 틀에 박힌, 정량적인 평가 위주의 우리 공교육은 AI 시대에 잘 적응하고 있지 못하다. 미래에는 AI 도구를 적재적소에 활용하는 것도 하나의 능력으로 취급될 텐데, 공교육 기관에서는 무작정 막기만 한다. 거꾸로캠퍼스는 공교육과는 다른 교육을 지향하고 있는 만큼, AI 시대에도 더 잘 대응하고 있지 않을까. 학생들에게 거꾸로캠퍼스에서의 AI 교육에 대해서도 물었다. 일단 코칭스태프(선생님)들이 AI 도구들의 사용법을 체계적으로 알려준다고 한다. 그리고 각종 활동에서 일상적으로 AI 도구를 사용한다. 맵퍼스 팀의 오즈, 슬로우즈 팀원들과 졸업생이 한목소리로 “AI 도구는 일상”이라고 입을 모았다.
거꾸로캠퍼스에는 시험도, 정해진 시간표도, 틀에 박힌 수업도, 심지어는 졸업도 없다. 하지만 그것들의 빈자리는 세상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치열한 토론과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도전정신으로 가득 차 있다. 거꾸로캠퍼스 학생들이 만들어내는 것들은 단지 팀 프로젝트의 결과물이 아닌, 낡은 공교육의 틀을 깨고 새로운 길을 만드는 선생님들과 학생들의 선언이다.
AI가 점점 많은 것을 대신하는 시대, 우리 교육은 무엇을 해야 할까. 거꾸로캠퍼스는 묻는다. 미래의 인재는 주어진 답을 잘 외우는 사람도 아니고, 가르치는 이의 강의를 일방적으로 수용하는 사람도 아니다. 이미 교실 밖, 거꾸로캠퍼스 학생들의 프로젝트 현장에서 드러난 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