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는 아직 군사정권 시대?
[은평구 18개교 전수조사] '불온 문서' 등 인권침해 교칙 있는 학교 83% 육박...교육청은 "학교별 차별화"
어느 사회에서나 규칙은 필요하다. 세계적으로는 국제법이나 조약 등이 있고, 나라 안에서는 법이 있다. 기업은 정관이나 내규를 마련해 회사 자신과 직원들의 근무를 규정하며, 학교는 교칙과 학생생활규정을 두어 학생들의 생활을 규율한다.
우리 사회는 이러한 규칙을 민주적으로 만들고 고친다. 국제법은 각국의 대표가 만나 의견을 모아 만들고, 국내법은 국민의 대표인 국회의원이 모여 만든다. 기업의 정관이나 내규도 내부 구성원들의 의견을 수렴한 뒤, 회사의 주인을 대변하는 이사회에서 만들고 고친다.
학생 의견 수렴은 요식행위...하달식 규정 문제 많다
하지만 학교에서의 교칙과 학생생활규정은 민주적인 절차와는 거리가 먼 방식으로 만들어진다. 아마 이 기사를 읽는 학생 독자 대부분이 자신의 학교 학생생활규정의 제·개정 절차에 참여해 본 적이 없을 것이다.

거의 모든 학교의 학생생활규정에는 “학생 또는 학생대의원(학급회장) ⅓ 이상의 동의가 있으면 학생생활규정의 개정안을 발의할 수 있다”는 내용이 들어가 있다. 개정안은 학생 위원이 ⅓ 이상인 ‘학생생활규정 제·개정심의위원회’에서 심의해야 하고, “전체 학생들의 의견 제출권을 보장”해야 한다. 일부는 이러한 장치를 토대로 “학생들의 의견이 반영된다”고 주장할 수 있지만, 실질적으로 학교에서는 이러한 절차가 제대로 진행되고 있지 않다.
학생 의견 수렴은 학생회 임원들을 모아 놓고 개정 사항을 통보하는 요식행위에 가깝고, 개정안을 전체 학생들이 열람하고 이의를 제기할 수 있도록 하고 있지도 않다. 보통 학생생활규정은 교사들이 따로 의논하고 개정한 후 학생들에게 단순히 공지하기만 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진다.
교사들이 만들어 학생에게 내려오는 하달식 규정은 필연적으로 인권침해를 야기한다. 학생의 참여 없이 만들어진 학생생활규정은 교사가 학생을 통제하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되고, 학생의 권리는 최소한으로 보장된다.
마치 법원에서 재판도 하고 법도 만들고 통치도 하는 식이다. 정상적인 민주 사회라면 분할되어 있어야 할 권력들이 학교에서는 교사에게만 부여되어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학생 자치 활동은 특별한 혜택처럼 취급된다. 학생들이 주체적으로 나서서 학생생활규정을 개정하려는 노력은 복잡한 절차와 교사·학부모의 반발 때문에 가로막힌다.
교사가 만드는 학생생활규정은 시대의 흐름을 제대로 반영하지도 않는다. 2012년 서울에서 학생인권조례가 제정된 이후, 두발 규제와 화장 규제가 (형식적으로는) 사라졌다. 표현의 자유나 집회·결사의 자유를 침해하는 학생생활규정도 올바르게 고치는 것을 교육청 차원에서 장려했다. 하지만 아직도 대다수 학교 학생생활규정에 인권침해적 조항이 남아 있다. △‘집단행동 선동’ △허가 없는 동아리 조직 △불법 집회에 가담하거나 불법 단체에 가입 △불온 문서를 유포·게시·제작·탐독 △경찰서에 연행되거나 구속 등의 행위를 징계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심지어는 화장·염색·파마를 금지하는 학교도 있다.
구산·연신·영락중만 교육청 가이드라인 따랐다
이러한 규정들을 수치화하기 위해 <토끼풀>은 은평구 관내 18개 중학교의 학생생활규정을 전수조사했다. 조사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무려 83%(15개)의 학교에서 인권침해적 조항이 발견됐다. 구산·영락·연신중학교만 서울시교육청의 학생생활규정 가이드라인(예시안)을 충실히 따른 학생생활규정이 마련되어 있었다. 학생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내용이 있는 학교가 대다수라는 건데, 앞으로 은평구 외 다른 지역에 대해서도 조사가 필요해 보인다. 특히 ‘불법 집회’나 ‘불온 문서’ 등의 조항은 일선 학교에서 교사의 판단에 따라 자의적으로 적용될 수 있다는 점에서 인권침해적이다. 이러한 조항들에 대해 세세히 살펴보겠다.
‘집단행동을 선동’하는 행위를 징계하는 학교는 10개였다. 일단 ‘선동’의 기준 자체가 모호하다. 집단 행동을 규제한다는 발상도 반헌법적이다. 우리 헌법에는 ‘집회 및 결사의 자유’가 명시되어 있는데, 학교에서의 집단 행동을 막는 건 헌법에 어긋난다. 법률적으로도 형법의 ‘내란선동죄’나 테러방지법의 ‘테러선동죄’ 등 대중을 선동하는 것이 국가적인 이익을 상당부분 침해할 때만 ‘선동’과 ‘집단 행동’을 금지하고 있다. 그런데 일개 학교에 모든 종류의 집단 행동을 내키는 대로 징계할 수 있는 규정이 있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물론 학교를 무너뜨리려는 목적으로 학생들을 선동하는 행위는 징계해야겠지만, 단순히 학교의 비상식적인 조치에 민주적으로 항의하는 행위까지 징계할 수 있는 것은 불합리하다.
‘허가 없는 동아리 조직’을 통한 ‘교칙 문란’을 징계하는 학교는 8개였다. 우선 동아리는 학생들이 자유롭게 모여 활동하는 조직인데, 왜 학교의 허가를 받고 만들어야 하는지 의문이다. 물론 학교의 시설물을 사용할 때는 허가가 있어야겠지만, 단순히 학생들이 모이는 것 자체를 규제하는 건 비상식적이다. ‘교칙 문란’도 기준이 모호하다. 내란죄의 구성 요건인 ‘국헌 문란’에서 따 온 것 같은데, 학생들을 잠재적 내란 우두머리로 취급하는 것인가. ‘교칙 문란’ 행위에 대한 명확한 기준이 없으면 ‘교칙 문란’은 곧 ‘학교 관리자의 의사에 반하는 것’이 되기 쉽다. 실제로 신도중학교에서는 <토끼풀>을 ‘허가 없이 동아리를 조직해 교칙을 문란하게 한 행위’로 취급해 배포를 금지했다.
‘불온 문서’를 제작·게시·탐독·유포하는 것을 금지하는 학교는 10곳이었다. ‘불온 문서’는 더욱 기준이 없다. ‘학교 관리자들이 보기 싫은 문서’가 바로 불온 문서 아닐까. 과거 군사정권 시절 ‘금서’를 지정해 일부 서적의 출간을 금지한 행위와 무엇이 다른가. 당시 ‘금서’에는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등이 포함됐다. 실제로 위에서 언급한 신도중학교에서는 <토끼풀>을 불온 문서로도 규정해 배포 금지의 명분으로 썼다.
9개의 학교에서 ‘불법 집회에 참여’ 하거나 ‘불온 단체에 가입’하는 행위를 징계하고 있었다. ‘불법 집회’는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집시법)이라는 비교적 명확한 기준이 있지만, ‘불온 단체’는 기준이 없다. ‘학교 관리자에게 거슬리는 단체가 곧 불온 단체’로 변질될 염려가 있는 것이다.
이성 교제를 금지하거나 일부 제한하는 학교도 5곳 있었다. 일반적으로 이성 교제 전체를 금지하지는 않는다. 보통은 ‘불건전한’이나 ‘과도한’ 등의 수식어를 붙여 규제한다. 하지만 이 또한 학교에서 자의적으로 적용할 수 있다. ‘불건전’은 과연 어디까지일까. 키스는 불건전한 행위일까. 손 잡기는? 포옹은? 그렇다면 대다수 어른들도 불건전한 이성교제를 일삼고 있는 셈이 된다. 피임하는 방법을 가르치거나 데이트폭력 등 범죄를 예방하는 것도 부족한 마당에 고작 이성 교제를 규제하는 데 학교의 자원을 투입하는 것은 낭비다. 학생 개인의 행복추구권을 침해하는 것이기도 하다.
'화장 전면 금지·화장품 소지 금지'도
여기까지는 꽤나 보편적인 사례들이다. 그런데 2000년대 이후로 전국에서 대부분 없어진 화장·염색·파마를 금지하거나 일부 규제하는 학교들도 있다. 화장은 5곳, 염색은 3곳, 파마는 2곳에서 금지·규제하고 있었다. 대부분은 화장·염색·파마 중 한 종류만 규제하고 있는데, 충암중학교에서는 무려 화장과 염색, 파마를 전부 금지한다. 심지어는 화장품을 휴대하는 것까지 금지하고 있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자연적 갈색 및 곱슬머리는 학교장의 결재를 득한 후 허용한다”는 조항이다. 도대체 무슨 근거로 자연 갈색과 곱슬머리까지 허가받아야 하는 것인가.

인권침해 조항이 있는 학교들과 세부 조항 목록은 이 링크에서 확인할 수 있다.
"백지에서부터 새로 만들어야"
각종 시민단체들도 과거부터 인권침해적 학생생활규정의 개정을 꾸준히 촉구하고 있다. 특정 지역 전체 학교의 학생생활규정을 전수조사해 국가인권위에 진정을 넣는 등의 활동도 이어진다.
이러한 운동을 이어 온 ‘청소년인권운동연대 지음’의 공현 활동가는 이러한 학생생활규정에 대해 “기존의 규정을 조금씩 고치는 식으로 접근하기보다는, 백지에서부터 새로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기존의 학교규칙 자체가 민주주의적인 원리에 따라 만들어지지 않았고, 학생을 규제할 목적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라고도 했다. 공현 활동가는 “근본적으로 학생의 학교운영 참여 보장을 통한 학교 민주주의 강화, 학생인권 침해를 구제하고 문제가 있는 학칙을 고칠 수 있는 법적 근거 마련 등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학생생활규정의 인권침해적 조항들은 교육청과 국가인권위에서 과거부터 개정을 장려하고 있다. 하지만 일선 학교에서는 이러한 권고가 반영되지 않는다. 왜 일선 학교까지 이러한 권고가 반영되지 않고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교육청에 정식으로 민원을 제기해 봤다.
<토끼풀>이 국민신문고를 통해 서울시교육청에 제기한 민원에 답변한 담당자는 전화를 통해 “각 학교 담당 장학사를 통해 직접적으로 전달하는 것에는 무리가 있다”며 “학생생활규정을 담당하는 부서(민주시민교육과)에서 일괄적으로 학교들에 전달하겠다”고 말했다. 별도로 보내온 답변서에는 "학교마다 차별화된 규정이 만들어질 수 있다"며 "매년 점검하고 있다"고 했다. 인권침해 상황에 대한 문제의식 부재와 소극적인 대응이 우려되는 대목이다.
인권침해적 요소가 다분한 학생생활규정, 이제는 고쳐져야 하지 않을까. 우리 사회는 1987년에 민주화됐지만, 학교는 아직 아닌 것 같다. 지금은 2025년이다.